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문단 편집) === [[나비 효과]] === 그런데 집회방해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생각치도 못하게 주먹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동대문파가 자유당의 [[SA|돌격대]]로서 정치테러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자유당의 비호아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이에 명동파에서는 하부 조직 중 상당수가 동대문파로 이탈하여 세력이 축소되고 있어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동대문파가 주먹계를 사실상 평정하면서 유일한 대항마였던 명동파는 집회방해 사건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던 동대문파를 습격해 주먹계를 통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화룡이 이정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직원 이탈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면서 [[선전포고]]를 했고 이정재는 조직 관리를 못한 이화룡의 탓이라며 일축해서 전면전에 나서게 된다. 안그래도 집회 방해사 건으로 시끄러운 마당에 명동파와의 전면전까지 앞둔 동대문파는 오히려 이 사건을 하나로 묶어 명동파를 싹쓸이 하는데 이용한다. 어차피 국민 여론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강력한 수사를 촉구한 만큼 이정재가 구속을 피할 길이 없던 유지광을 이용해 도전해 오는 명동파를 껴안고 자폭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명동파가 습격해오자 유지광이 전면에 나서 맞상대를 하고 몰려있던 기자들이 패싸움을 찍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패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이정재가 고향 후배이자 경무대경찰서장인[* 1950년대에는 [[대통령경호실]]이 없었다.] 곽영주에게 이 사실을 언질하였다. 이에 곽영주는 경찰부대를 두 조직이 패싸움을 하고 있는 도중에 출동시켜서 명동파와 유지광만 잡아가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하여 유지광과에 대결에서도 이기고 동대문파의 구역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 처럼 보이던 명동파는 보스인 이화룡, 부보스인 정팔, 주요 간부인 오상사와 맨발의 대장과 달마를 포함한 대다수 조직원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경찰이 유지광을 체포할 때는 정중한 어조로 체포를 요청했으며 일체의 강압적인 행동이 없었다. 명동파를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경찰 간부는 명동파에게 반말을 쓰는데다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 명동파의 억울한 항의가 섞인 말조차 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유지광은 어차피 자신의 구속을 피할수 없었기 때문에 자길 체포하는 경찰에 협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명동파는 유리했던 상황이 한 순간에 뒤집어졌다는 것에 대한 인지부조화와 암수를 쓴 동대문파에 대한 원망 등의 부정적 섞여서 경찰의 체포에 저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경찰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 그 자체만으로도 경찰이 정치깡패와 권력에 유착되었다는 걸 확인해 보여준다.] 그리고 패싸움터 주변에 있던 [[최동열]]을 포함한 여러 기자들이 취재한 것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서 명동파가 일말의 동정을 받을 여지조차 없에버리고 만다. 이로써 자신들을 방해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진 동대문파는 한국의 주먹계를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유지광은 불과 8개월만 감옥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나온 반면, 명동파는 전원이 징역 수 년 이상의 중형을 받고 감옥에서 좋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다가[* 실제로는 [[서북청년회]] 출신의 법조인들 덕분에 생각보다 가벼운 형을 살게 되었다.] 1960년대 초중반이 되어서야 출소할 수 있었다. 자세한 것은 [[충정로 도끼 사건]] 문서를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